넷플릭스 영화 [정이]는 휴머니즘을 내세운 SF 작품과 다름 없었습니다. 때는 황폐화가 이루어진 가까운 미래, 급격한 기후변화에 따른 해수면의 상승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지구에서 벗어나 우주로의 이주를 결정했고 새로운 터전인 쉘터를 만드는데 성공하여 지금까지와는 또다른 삶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하지만 쉘터에 살며 발생한 충돌로 말미암아 전쟁을 피할 수는 없었는데요, 그 속에서 크로노이드 연구소 팀장 윤서현(강수연)은 자신의 어머니이자 한때 전설적인 군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윤정이(김현주)의 뇌 데이터를 복제하여 최고의 AI 전투용병을 개발하려 애씁니다. 참고로 윤정이는 작전에 임하는 도중 생겨난 사고로 인하여 수십년 동안 식물인간 상태였어요.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내용에는 작품의 결말 및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크로노이드 연구소 소장 김상훈(류경수)은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려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으로 남다른 야망을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반면, 윤서현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유한 인공지능 로봇이 시뮬레이션을 거듭하는 동안 임무 수행에 실패할 때마다 뇌를 제외한 몸이 매번 폐기되는 걸 보고 괴로워하다 본인이 맡은 연구가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독단적인 선택을 감행합니다. 윤정이 AI를 탈출시키기로 결정한 거죠.
인간은 죽기 전에 뇌 복제 후 의체로 옮겨 가면 계속 삶을 유지하는 일이 가능했습니다. 다만 A, B, C로 나누어진 등급에 따라 인간과 같은 대우를 못 받을 수도 있는 것이 함정이었다지요. 그중에서도 윤정이의 뇌는 C등급으로 책정되어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됐고, 오히려 유족들에게 지원금이 전달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남겨진 딸 서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생활비와 교육비 등을 지급받는 대신, 윤정이를 닮은 클론을 만들어내는 일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되어 지금의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습니다.
그런데 길고 긴 전쟁에 합의점이 나타나게 되자 크로노이드 연구소 회장은 윤정이를 전투용병 AI가 아닌 가정용 AI로 탈바꿈할 것을 시도합니다. 그 속에서 연구소 동료가 정이의 얼굴을 가진 AI에게 비키니를 입힌 채 실험을 하는 걸 목격하고 서현은 충격에 빠지고 마는데 이걸 바라보는 저 또한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김상훈이 인간이 아닌 AI라는 사실이 밝혀지던 장면 역시도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음은 물론입니다.
이와 함께 정이 역으로 모습을 드러낸 김현주의 연기가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에 이어 영화 [정이]에서 한층 더 극대화된 액션을 토대로 인간과 AI 캐릭터를 동시에 선보여서 보는 내내 탄성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음을 밝혀 봅니다. 여기에 더해 회장을 쏙 빼닮은, 들을수록 재미도 없고 어이도 없어지는 개그 센스와 극악무도한 면모를 겸비한 김상훈 역 류경수의 활약도 보기 좋았어요. 윤서현 역 강수연의 모습도 영화에서 오래간만에 보는 거라 반가웠는데 유작이 되었던지라 고인의 명복을 빌게 되었음을 밝혀 봅니다. 단단한 목소리를 중심으로 강단 넘치는 열연을 확인하게 해줘서 인상깊었습니다.
그럼 이쯤에서 영화 [정이]의 결말을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서현은 자신과 관련된 기억을 지움과 더불어 아직 얼굴이 갖춰지지 않은 전투 AI에 정이의 뇌 데이터를 이동시킨 뒤, 탈출을 돕고자 무인열차에 탑승하여 연구소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움직입니다. 이때 김상훈의 방해 공작이 비롯되어 서현은 총상을 입게 되는데 쓰러진 상태에서도 정이에게 자유롭게 살라며 혼자 떠날 것을 요청해서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정이 AI는 떠나기 전, 서현에게 다가와 볼을 부비며 둘만이 공유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이 점도 감명깊게 남았습니다. 덕택에 뇌 데이터를 삭제해도 모성애가 남아있는 정이 AI가 선사하는 감동이 어마어마했다지요. 그후에 정이 AI는 홀로 높은 산에 올라 세상을 바라보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가 되었어요.
서현은 어린 시절 받았던 수술 부위가 재발되어 3개월 정도의 시한부 인생이 전부였고, 의체로 옮겨 사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으로 보여져 그대로 죽음에 이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엄마와의 추억으로 마지막 순간이 기억될 것 같아 이 점도 눈여겨 볼만 했습니다. 정이 AI가 시뮬레이션이 진행될 때 미확인 영역의 수치가 높아질수록 전투능력이 상승했는데, 이 부분은 사랑이었을 거라는 추측도 가능했어요. 딸을 향한 엄마의 사랑이요.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윤서현 아역으로는 박소이가 등장해서 이 점도 잊지 못할 거예요. 서현의 수술비를 벌기 위하여 전투에 참가하다 전설적인 영웅이 된 윤정이는 죽음이 찾아오기 전까지 오직 딸만을 생각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게 돼 눈물겨웠습니다.
SF 영화로 예상을 뛰어넘는 CG 기술과 스펙타클한 액션씬도 영화 [정이]의 볼거리 중 하나였습니다. 허나 작품의 결이 모성애를 소재로 한 휴머니즘에 가까웠으므로, 이 부분을 감안해서 보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연상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으로 유명한데 저는 딱 반반이라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적당한 신파가 곁들여진 가족영화로 한 번쯤 보기에 나쁘지 않은 정도였습니다.
덧붙여 넷플릭스 영화 [정이]를 통하여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도 곱씹어 볼 수 있어 뜻깊었습니다. 인간성을 포기한 인간과 인간보다 더 인간미 넘치는 AI가 선사하는 스토리를 통하여 휴머니즘이 깃든 SF 장르를 만나보게 돼 의미가 남달랐거든요.
모성애가 깃든 AI가 선보이는 애틋한 서사를 만나보고 싶다면, 넷플릭스 [정이]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99분의 러닝타임이 그리 길지 않게 느껴져 다행스러웠어요. 99분이라는 시간마저 절묘함을 담고 있는 듯해 의미심장하네요.
2023년 설 연휴를 떠나보내며 시청하기에 부담 없었던 작품과의 한때를 끄적인 영화 리뷰는 여기까집니다. 앞서 언급한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에서 함께 한 연상호 감독과 배우 김현주의 합이 잘 맞아들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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