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31일 월요일 오후 8시에 네이버 TV와 V LIVE를 통해 뮤지컬 [팬레터] 실황 녹화 중계를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이날 방영된 작품은 2017년 동숭아트센터에서 진행된 공연으로, 외출할 필요 없이 집에서 편안한 관람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공연계 역시도 상당한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는데, 얼른 상황이 나아져서 좋은 작품을 공연장에서 직접 만나보는 일이 가능해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참고로 뮤지컬 [팬레터]는 경성시대 문인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탄생된 모던 팩션으로, 경성시대 문인들의 모임 구인회에서 모티브를 얻고 여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완성되었다고 해요.
1930년대 경성, 팬레터를 계기로 문인들의 세계에 입문한 작가 지망생 정세훈의 성장 이야기가 담겨진 공연으로써 '뮤즈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문구가 부제로 사용된 작품이 뮤지컬 [팬레터]입니다. 자유를 억압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일제강점기가 배경이었던 데다가 세훈은 사정상 자신의 이름을 숨긴 채 몰래 글을 써야 했기에 이로 인해 벌어지는 상황들이 스릴러적 분위기를 뽐내서 섬뜩함까지 경험하는 것이 보는 내내 가능했던 시간이었어요.
칠인회에 들어온 해진이 그곳에서 문인들의 일을 도와주던 세훈과 만나면서부터 이야기는 급물살을 타기에 이릅니다. 여류작가 히카루와 편지를 주고받다가 사랑에 빠지게 된 해진과 그로 인해 위기에 처하는 세훈, 탐정 못지 않은 추리력으로 히카루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 이윤, 여기에 칠인회를 고발하는 투서의 존재가 얽히고 설켜 만들어내는 스토리 전개가 공연의 중심 내용이었습니다.
김해진(김종구), 정세훈(문태유), 히카루(소정화), 이윤(정민), 이태준(양승리), 김수남(이승현), 김환태(권동호), 7명의 배우가 무대를 가득 채우며 멋진 연기와 노래를 선보여서 시청하는 내내 눈을 뗄 수 없게 도왔던 작품이 뮤지컬 [팬레터]였습니다.
문인들의 모임 외에도 김해진은 소설가 김유정, 이윤은 시인이자 소설가로 알려진 이상, 김수남은 시인 김기림을 모티브로 했다는 사실을 알고 보니 한층 더 흥미로움이 극대화돼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이윤을 비밀을 알아채는 사람으로 설정한 점이 인상깊었어요.
김해진에 대한 팬심으로 가득했던 문학소년이 섬뜩한 광기를 품은 채 서서히 변화해가는 과정을 확인하게 해준 정세훈 역의 문태유는 흡입력 넘치는 연기와 노래로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최근에 출연한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용석민을 맡아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확실히 찍은 상태이기도 하죠. 그에 앞서 연극·뮤지컬 배우로도 다채로운 활약을 펼쳤기에, 이렇게 녹화 중계를 통해 만나는 일이 더 반가웠어요.
아담한 체구와 미성의 청량한 목소리가 문학소년다운 소년미를 뿜어내서 캐릭터와 찰진 싱크로율을 선보였고, 감탄을 자아내는 노래 실력으로 넘버 소화 역시 완벽함을 자랑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눈빛이 달라짐으로 인해 소름이 돋게 했던 순간도 잊지 못할 것 같네요.
이와 함께 실황 녹화 중계 시작에 앞서서 인터뷰를 통해 넘버 중에서 '눈물이 나'라는 곡을 언급하기도 했는데요, 덕분에 더 유심히 보고 듣게 돼 뜻깊었습니다. 그토록 존경했던 작가를 만나게 되었고, 같은 공간에서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눈물이 날 수 밖에 없었을 거예요. 순수한 기쁨과 감동의 눈물이 세훈을 사로잡았던 순간이 솔직하게 표현된 노래라서 저 역시도 기억에 남았습니다.
히카루는 세훈을 통해 세상 밖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존재입니다. 세훈의 또다른 자아이자 관념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데, 해진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히카루를 여성으로 착각하게 되며 이야기는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닫게 되고 말아요.
하지만 그 와중에도 히카루는 당황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계속해서 편지를 보내며 해진을 이끌어 나갑니다. '거짓말이 아니야'란 넘버에서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도 하는데, 이는 비극적 운명을 암시한 것과 다름 없다고 봐도 무방했습니다.
세훈과 달리 욕망에 솔직한 히카루 역은 소정화가 맡아 시원한 가창력으로 귀를 뻥 뚫어주었습니다. 말을 할 때도, 글을 쓸 때도, 거침없는 행동력이 매력적이었어요.
뿐만 아니라 세훈과 히카루, 두 사람이 거울 앞에서 호흡이 척척 맞는 안무를 선보일 때도 탄성이 절로 나왔답니다. 바닥에 보여지던 원고지 조명도 작품의 컨셉과 잘 맞아서 최고였어요.
아무도 모르는 슬픔을 간직한 채 외로이 살아왔던 해진이 히카루를 통해 교감하며 시작된 사랑은 슬펐지만 한편으로는 아름답기도 했어요. 진실을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내색하지 않고, 편지를 통해 마지막 인사를 전해던 장면에선 그래서 눈물이 흐를 수 밖에 없더라고요.
김해진 역의 김종구는 노래를 부르자마자 음색에 반하게 만든 인물이었습니다. 병을 앓고 있어 신체는 허약할지라도 섬세한 감성과 글을 향한 열정은 불타올랐던 캐릭터가 눈여겨 볼만 했어요. 공연 전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김해진 캐릭터를 솜사탕 같던 사람이 흑사탕으로 변한다고 설명했는데, 직접 보게 되니 제대로 이해가 돼서 박수가 절로 나왔어요.
넘버 중에서는 '그녀를 만나면'을 꼽았고, 이 곡을 통해 해진이 지닌 히카루에 대한 진심을 엿보는 게 가능해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히카루의 비밀을 아는 세훈의 걱정 또한 담겨 있어 다양한 감정이 교차되게 했던 넘버이기도 했음을 밝힙니다.
배우들이 선택한 곡 외에 세 사람의 왈츠가 일깨워주는 관계성이 돋보였던 1막 마지막 곡인 '섬세한 팬레터'와 2막 속 '해진의 편지', '내가 죽었을 때'가 기억에 남았어요. 그중에서도 뮤지컬 '해진의 편지'의 여운이 진하게 마음을 파고들었답니다.
뮤지컬 [팬레터] 실황 녹화 중계는 아무리 편지를 주고 받는 동안 사랑에 빠졌다고 하더라도, 글만으로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얼굴을 꼭 보고 정체를 파악하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문학이 사람을 구원한다'는 말의 의미 또한 깨닫게 해주었음은 물론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빛을 발하게 되는 예술의 필요성을 알려주는 공연이었다고나 할까요? 다만 김해진이 김유정을 모티브로 했다는 점에서 그가 일으킨 실제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고, 투서를 쓴 장본인에 대한 조치가 안일함을 느끼게 해줘서 아쉬움이 남았음을 인정합니다. 아, 그리고 커튼콜을 안 보여주고 끝나서 이 부분도 섭섭했어요.
경성시대 문인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탄생된 모던 팩션으로 장점과 단점이 극명했던 뮤지컬 [팬레터]였습니다. 그래도 공연에 쓰여진 넘버의 멜로디와 가사가 공감되는 내용이 많아서, 이 점은 가끔씩 생각이 나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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