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2002년에 개봉했던 작품인데, 올해 재개봉됨에 따라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잔잔한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시네마 천국'과 '베스트 오퍼'를 연출한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과 두 작품의 음악을 담당한 엔니오 모리꼬네가 다시금 의기투합해 탄생된 만큼, 눈과 더불어 귀가 즐겁지 않을 수 없었던 영화였어요.
유럽과 미국을 오가는 배, 버지니아 호에서 1900년에 태어나 생을 마감할 때까지 바다 위의 삶을 영위한 천재 피아니스트 나인틴 헌드레드의 이야기가 그의 유일한 친구였던 트럼펫 연주자 맥스를 통해 펼쳐지면서 경험하는 것이 가능했던 놀라움이 생각지 못한 감동을 전해주기에도 충분했답니다.
1등석 연회장의 피아노 위 레몬 상자 안에 놓인 채로 버려진 아기를 발견한 대니 부드만(빌 넌)은 아이에게 "대니 부드만 T.D. 레몬 나인틴 헌드레드"라는 이름을 붙여준 뒤 그가 일하는 버지니아 호에서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배에서 발생한 사고로 대니는 죽음을 맞이하고, 이로 인해 나인틴 헌드레드는 처음으로 버지니아 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떠요. 그리고, 한밤중의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로 선실에서 잠든 사람들을 깨우기에 이릅니다.
이날 이후로 세월이 많이 흘러 트럼펫 연주자 맥스가 버지니아 호 악단의 단원이 되기 위해 배에 오르고, 나인틴 헌드레드와 우정을 쌓으며 보낸 시간을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속 화자가 되어 들려줘요. 그렇게 현재에서 과거로, 다시 현재로 오고 가는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천재 음악가의 감미로운 선율을 품은 바다를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피아니스트를 주인공으로 제작된 영화인 만큼, 음악에 엄청난 공을 들였음을 확인하게 해준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그런 의미에서 황홀한 피아노 선율을 만끽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녔습니다. 엔니오 모리꼬네는 영화음악의 거장으로도 유명한데요, 이러한 타이틀의 진가를 작품 속에서 마주하게 돼 만족스러웠어요.
저는 이 영화의 스토리 라인보다는 음악이 더 감명깊긴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명장면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습니다. 폭풍우가 몰아침으로 인해 흔들리는 배 안에서 구토 증세로 정신을 못 차리던 맥스(프룻 테일러 빈스)의 앞에 나타난 나인틴 헌드레드(팀 로스)가 피아노 앞에 앉아 고정장치를 풀어달라고 부탁한 다음, 자신의 옆에 자리를 잡으라고 말하더니 두 손으로 멋지게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면서 만나게 된 장면은 정말 최고였어요. 두 친구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라고나 할까요?
1등칸 연회장 곳곳을 피아노가 움직이는대로 따라가던 둘의 표정은 좋아하는 놀이기구를 타게 돼 신난 어린 아이의 표정과 다를 바 없었어요. 이러한 상황은 나인틴 헌드레드가 선사하는 피아노 연주로 인해 극대화되며 황홀함을 자아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듯 상상을 뛰어넘는 판타지로 가득했던 찰나가 그들이 처한 현실로 돌아오게 만든 건, 피아노와 충돌한 유리창이 깨져버리면서부터였지만 그건 중요치 않아 보였어요. 적어도, 나인틴 헌드레드와 맥스 두 사람에겐 말이지요.
나인틴 헌드레드는 1등석 연회장에선 복장을 갖춰입고 악단 단원들과 정해진 악보를 기본으로 약간의 즉흥 연주를 겸하는 말썽꾸러기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의 진가는 3등석에 마련된 피아노를 통해 만나보는 것이 가능해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건반 위에서 자유롭게 흘러가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전하는 선율에는 기울이지 않을 도리가 없더라고요.
태어나서 한 번도 피아노를 연주해 본 적 없는 아이가 선보이는 놀라운 재능은 버지니아 호의 명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배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이 나인틴 헌드레드를 사랑했음을 영화 곳곳에서 깨달을 수 있어 마음이 따뜻해졌답니다.
피아노가 인생의 시작이자 끝이었던 나인틴 헌드레드의 일대기에는 맥스와 우정과 더불어 사랑의 아련함 또한 엿볼 수 있었습니다. 피아노 연주를 하며 선실 밖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에 와닿은 소녀(멜라니 티에리)의 모습은 강렬함을 자아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인틴 헌드레드를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되어주진 못했기에 오히려 더 여운이 남았어요. 덧붙여, 둘의 만남이 단순한 우연인 것만은 아니었으니 이 점은 영화를 통해 직접 확인해 주시면 좋겠네요.
버지니아 호를 떠나 땅에 발을 내딛고 싶었던 때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나인틴 헌드레드는 결국 배 위의 피아니스트로 영원히 기억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피아노 위에 홀로 남게 됐을 때부터,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에서 피아노 치는 나인틴 헌드레드의 옆에서 맥스가 트럼펫을 불며 환상의 하모니를 뽐내던 장면도 좋았어요. 서로를 가슴 깊이 이해할 줄 아는 둘이었기에, 눈빛으로 진심을 표현하는 장면도 그래서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야기의 진행 방향과 결말은 예정된 거나 다름 없었기에 그 흐름을 따라가며 영화에 몸을 맡기게 됐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남는 건 역시나, 음악이더라고요.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OST는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이 작품을 추억하는 매개체로 오래도록 곁에 남아 있을 듯 합니다.
참고로,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소설 '노베첸토'가 원작이라고 하니 관심 있는 분들은 책도 읽어보시면 어떨까 싶어요. 제가 이 소설을 읽은 건 아닌데, 노베첸토라는 단어는 익숙한 걸로 봐선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있나 봐요. 그러니 시간 내서 원작소설도 꼭 정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작품 관람의 기준에 있어 음악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분들에게 높은 만족도를 선사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음악영화의 묘미를 접하고 싶을 때 보면 참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2020년 새해의 문화생활을 꽤나 마음에 드는 영화와 함께 출발할 수 있어 저는 즐거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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