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JTBC에서 방영된 드라마 [마녀보감]은 저에게 판타지 퓨전 사극의 재미를 알려준 작품이었습니다. 조선시대가 배경이며 저주로 인하여 백발마녀 서리가 되어버린 공주 연희와 서자로 태어나 갖은 고생을 겪어 온 비운의 천재 허준을 중심으로 만나볼 수 있었던 이야기는, 두 사람의 사랑과 성장에 초점을 두게 됨에 따라 조선청춘설화라는 타이틀 역시도 어색하지 않은 드라마였음을 확인하게 해줘 보는 내내 흥미로웠답니다.
총 20부작으로 제작된 드라마 [마녀보감]은 시선을 사로잡는 그래픽 기술이 판타지의 묘미를 선사함과 동시에 전통한복과 퓨전한복을 고루 만나볼 수 있는 의상의 아름다움까지 경험하는 것이 가능해 인상적이었어요. 스토리 전개는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배우들의 연기도 탁월했기에 마지막회까지 집중해 바라보게 해주었습니다.
참고로, 이제부터 여러분이 읽을 이야기에는 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이 점을 꼭 기억해 주세요.
이야기의 시작은 홍주(염정아)의 흑주술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명종(이다윗)과 중전 심씨(장희진)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지 않자 대비윤씨(김영애)는 흑무녀 홍주를 궁에 불러들이고, 홍주는 신력이 강한 무녀 해란(정인선)을 통해 중전의 회임을 계획합니다.
저주와 주술에 능한 홍주는 조선의 번영이 아닌 멸망을 위해 힘을 쏟는 인물이었는데, 녹록치 않은 궁녀 생활 속에서 소격서 우두머리 최현서(이성재)의 도움으로 살아가다 흑주술의 유혹에 빠져들어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는 악역 캐릭터로 드라마의 중심을 잡아주었기에 눈길을 잡아끌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염정아의 열연이 탄생시킨 홍주의 진면목은 드라마 [마녀보감]의 명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함께, 홍주가 흑주술을 통해 악귀를 불러냈을 때 들려오던 BGM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던 효과음은 공포를 극대화시키는 최고의 장면이었기에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돋아요. 드라마 [마녀보감]의 초반부가 선사한 긴장감이 엄청났으므로, 이 부분을 확실하게 책임진 홍주의 역할이 컸다고 여기는 바입니다.
그리하여, 홍주의 계락에 의해 세상에 발을 디딘 주인공이 바로 연희(김새론)입니다. 쌍둥이 남동생이었던 순회세자 부(여회현)의 죽음은 열 일곱에 찾아왔고, 연희 역시 같은 나이에 저주가 발현돼 서리라는 이름으로 숨어살며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되는 인물입니다.
청빈사에서 발견한 마의금서에 따르자면, 저주를 풀기 위해선 북신이 사라지기 전까지 108개의 초에 전부 불을 밝히고 주문을 외우면 된다고 합니다. 만약 북신이 사라지기 전에 저주를 풀지 못할 경우, 저주를 풀려는 자가 목숨을 잃기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의 마녀 서리이자 비운의 공주 연희 역은 김새론이 맡았습니다. 백발과 더불어 냉기가 묻어나는 서리일 땐 차가운 심장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고, 연희일 때는 평범한 10대 소녀와 다를 바 없어 안타까움이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김새론이 17세였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 했어요.
어른들의 살벌한 대립 속에서 죄없는 아이가 저주를 지니고 태어났다는 점이 마음 아팠고, 정해진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선택을 두려워하지 않던 연희의 단단한 마음이 눈물겨운 시간을 경험하게 해서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뗄 수 없었습니다. 김새론의 열연 역시도 기대 이상이었고 말이지요.
서리와 연희의 곁에 머무르게 된 허준 역은 윤시윤이 맡아서 찰떡궁합을 선보였습니다. 윤시윤이 연기한 허준은 저서 동의보감 집필과 더불어 명의로 알려진 동명의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구축된 캐릭터로 호기심을 자아냈습니다. 참고로, 동의보감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상상해 쓰여진 이야기라서 드라마 제목이 [마녀보감]이 된 거라고 해요.
근데 아무리 제목과 모티브와 캐릭터를 따온 것이라고 해도, 굳이 실제 살았던 인물을 가져올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게 오히려 몰입을 방해했거든요. 왜냐하면 마지막회에서 40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어느 날에 허준이 동의보감을 완성하는데 거기에 마의금서에 쓰인 내용이 담기고 그렇게 완성된 서책이 동의보감이 되는데, 이것을 위해 허준이 허준이었던 것만 같아서 말이지요.
이러한 이유로, 제가 원하는 결말은 대체적으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허준과 연희가 희생수를 반씩 나눠 마심에 따라 마의금서의 내용과 다른 방식으로 저주가 풀리고,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걸 기대했었어요. 덧붙여, 의과에 합격한 허준이 사람들을 진료하며 깨닫게 된 사실들과 과거에 연희와 함께 경험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집필한 서책이 마녀보감이라는 제목으로 완성되었다면 훨씬 더 드라마의 타이틀에 걸맞는 결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어요. 여기에 저주를 풀 수 있는 새로운 방법까지 기록해 놓는 거죠.
왜 이런 생각을 했냐면, 희생수를 전해준 인물(안길강)에 대한 정체가 허심탄회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로 드라마가 막을 내렸기 때문에. 마의금서를 써내려간 주인공이라는 추측을 하게 해주었지만 그게 전부였어서, 이런 식이라면 저자가 몰랐던 저주를 풀 수 있는 다른 방법도 존재할 것만 같아서요.
드라마가 재미는 있는데, 군데군데 묘하게 구멍이 있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대목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배우들이 하드캐리하긴 했지만 그래도 결말이 와닿진 않더라고요. 40년 후의 허준으로 특별출연한 김갑수 배우는 역시나 짧은 생을 마감하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부분에 등장했고, 10대로 돌아간 허준이 연희와 만나며 엔딩을 맞이했으나 별로 설득력은 없었답니다.
초반부에 비해 상당히 허술했던 후반부는 제 기준에서 명품 결말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 물론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취향에 따른 후기일 뿐이니 이런 생각을 하는 시청자도 있었구나 하고 넘어가 주시면 좋겠습니다.
마의금서에 적힌 마지막 장에 적힌 내용의 비밀은 진실한 사랑의 희생이었고, 허준이 아닌 연희가 사랑을 위해 희생수를 마시며 자취를 감추는 순간은 명장면이라고 봐도 무방했습니다. 근데 결국에는, 저주를 저주로 끊어낸 것만 같아서 슬펐어요.
허준 역의 윤시윤과 연희 & 서리 역의 김새론은 14살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멋진 케미로 눈을 즐겁게 해줬음을 인정합니다. 아무래도 김새론이 10대였기에 두 사람의 사랑은 순수함의 결정체로 그려졌는데 그게 참 좋았어요. 서로를 향하는 눈빛만으로도 모든 설명이 가능했으니까요.
겉모습이 아닌 한 사람의 진짜 내면을 알아볼 줄 아는 허준이 윤시윤으로 인해 빛나서 역시나 탁월한 캐스팅이 아니었나 싶네요. 곽시양이 연기한 풍연과 대비되는 온도차도 마찬가지였고요.
이와 더불어, 드라마 [마녀보감] 세트장과 촬영지도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제주도 돌문화공원, 문경새재, 해남 도솔암, 충북 제천 금월봉 등등을 보며 우리나라에 이런 풍경이 있었구나 싶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리고 청빈사 내부는 세트장으로 추측이 되는데 굉장히 예쁘게 잘 만들어놔서 역시나 절로 눈길이 갔답니다.
내외적으로 신경을 굉장히 많이 쓴 티가 나는 작품이라 더 좋았던 드라마 [마녀보감]이었습니다.
저에게 드라마 [마녀보감]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을 꼽으라면, 저는 이 부분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최종화인 20회에서 두 사람이 방패연에 서로의 얼굴을 그린 후 해맑게 웃던 장면이요. 두 사람을 하나로 엮어준 매개체와도 같았던 연을 잊을 수는 없지요. 둘이 같이 연날리기를 하던 순간도 마찬가지고요.
마지막으로, 드라마 [마녀보감] OST로 귀호강을 전해준 더 러쉬의 '연'도 가끔 머리 속에 떠오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 노래의 제목마저 연이라서, 더 애틋한 감이 밀려오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노래를 부른 가수의 목소리와 멜로디와 가사가 드라마와 100% 싱크로율을 맞닥뜨리게 해서 자꾸 듣게 되었던 곡이라서 더더욱 그렇습니다.
판타지 퓨전 사극의 재미 반, 아쉬움 반을 남긴 드라마 [마녀보감]에 대한 얘기는 이제 마무리를 해볼까 합니다. 1회부터 20회까지 보는 동안 1회가 제일 재밌었기에 전형적인 용두사미 드라마 중 하나로 남게 되겠지만요. 좋은 부분도 많았던 건 맞아서 안타깝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요. 언젠가는 저의 마음에 쏙 드는 판타지 사극을 다음에는 만나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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