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스페셜 [연우의 여름] : 내가 나일 때 비로소 빛나는 이유, 그러니까 제 이름은요
단 한 편의 이야기로 모든 것이 완성되는 드라마, 단막극의 매력은 짧은 시간 속에서 긴 여운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어요. 연속극과 16부작 드라마의 흐름 속에서 예전보다 단막극의 입지는 줄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우의 여름] 또한 그렇게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2013년, KBS 드라마 스페셜로 방영된 [연우의 여름]은 아버지로부터 자신에게로 이어져 온 연우수리점을 운영하며 고장난 물건을 고치고 카페에서 인디밴드 보컬로 생계를 꾸려가던 연우로부터 시작됩니다. 빌딩에서 청소 일을 해오던 엄마가 교통사고로 일을 나갈 수 없는 처지에 이르자 일자리를 잃을 두려움에 대타로 딸을 내보내게 되면서 말이죠.
딸의 이름을 내건 수리점을 통해 가족들을 책임지던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도 동네를 떠날 수 없어 머무르게 된 연우. 아기자기한 연우수리점의 풍경과 더불어 카페의 분위기와 인테리어 또한 눈을 사로잡아 흥미로웠습니다.
평범한 직장인의 삶이 아닌,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연우의 모습이 행복해 보여서 더더욱 좋았어요.
연우는 엄마 대신 청소 일을 하게 되면서, 그곳에서 동네에 살다 이사간 친구 지완과 우연히 만나 반가워해요. 회사 아나운서로 일하는 지완의 모습과 청소용 유니폼을 챙겨 입은 자신의 모습이 비교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을 테지만 그보다 오랜만에 마주하게 된 또래와의 조우가 훨씬 즐거워 보였습니다.
엄마 직장으로의 첫 출근은 낯설었지만, 그녀를 챙겨주는 이가 있어 외롭지는 않았습니다. 빌딩 내부의 작은 공간 안에서 함께 밥을 먹으며 잠시나마 숨을 돌릴 틈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어요.
일을 시작하기 전, 청소부 멤버들을 모아놓고서 연우를 가리키며 그녀처럼 몸이 아플 때 대신 일해 줄 사람이 없으면 그만둘 각오를 해야 한다는 냉정한 말에는 수긍하기 힘들었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했던 엄마의 마음만은 이해할 수 있어 안타까운 장면도 있었습니다.
드라마 스페셜 [연우의 여름]은 잔잔한 감동과 더불어 음악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가능해 더 의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특히, 연우가 일을 하다 말고 건물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서울 풍경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노랫말을 읊조리던 장면에서 들려오던 플라스틱 피플의 '사거리 연가'는 너무나도 오랜만이라 정말 기뻤다지요.
정바비가 음악을 맡음으로써 드라마와 잘 어울리는 아기자기하면서도 의미있는 노래들을 한껏 감상하는 것이 가능해 즐거웠던 것 역시, 이 작품을 더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이유로 남게 될 듯 합니다.
연우는 지완의 부탁으로 그녀의 부모님이 주선한 소개팅에 대신 나가 증권사 신입사원이 된 윤환과 만나게 되고, 차 한잔만 마시면 된다는 소리에 꾸미지 않은 모습을 보이며 편안함을 선사해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같은 자리에 서서 상대방을 기다렸던 둘은 어색한 인사 후에 식당을 찾아 돌아다니지만 어느 곳이든 예약을 하지 않아 오래 기다려야 했고, 연우는 한강을 보며 앉아 맥주 한캔을 마시는 것으로 만족해 하지요. 소개팅에서 편해지기 쉽지 않은데 마음을 놓았기에 성공적인 결과가 생겨난 게 아닐까 싶어요.
그렇게 예상 외의 시간을 보냄으로써 윤환은 연우를 마음에 들어하며 가까이 하려 하지만, 그녀는 지완이 아니기에 멀어지려 하면서도 끌리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만남 속에서 이제 그만하라는 지완의 압박과 자신의 처지를 놓고 갈등하면서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해요. 사랑이란 것이, 쉽게 마음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던 와중에 발생하게 된 지완과의 말다툼은 연우를 괴롭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와중에 수도꼭지를 완전히 잠그지 않아 흘러 내리던 물방울과 개수대 주변의 물을 닦아내기 위해 아낌없이 뽑아낸 상태로 버리지 않은 휴지들은 지완이 화장실에 남겨 놓은 흔적으로, 연우가 청소하고 관리해야 하는 잡동사니로 존재하게 하며 다시금 둘의 위치를 상기시키게 만들었어요.
뿐만 아니라 아르바이트를 하는 카페에서 자신이 만든 멜로디의 가사를 고민하던 연우가 동화 같은 노랫말이 어떠냐며, 사는 게 비루한데 꿈꾸는 것도 거지 같아야 되겠냐고 소리치던 장면은 현실적인 공감을 불러내며 마음을 짠하게 했습니다. 일하다 힘들고 사람 만나 힘든 건 다 지나가는 거라던 엄마의 따뜻한 위로 역시도 마찬가지였고 요.
다만, 윤환의 앞에 서면 작아질 수 밖에 없는 연우의 모습은 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평범한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고 돈을 잘 버는 것도 아니라 초라해져야만 하는 그 심정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요. 분명히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때때로 그들을 짓누르는 인생의 무게가 전해져 와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아나운서가 아닌 빌딩 청소부의 모습을 한 연우를 발견한 윤환은 끊임없이 전화를 시도하지만 그녀는 받지 않아요. 때마침 지완과의 갈등도 최고조에 이르렀으나 연우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해결책을 제시하며 그에 따른 결과를 기다립니다.
오랫동안 써지지 않던 가사를 완성해 냄으로써 카페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불렀던 연우의 자작곡 '제 이름은요'는 드라마의 제목을 포함한 모든 것을 아우르는 노래였다고 볼 수 있어요. 마음이 가는 사람 앞에서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말할 수 없었던 슬픔을 극복하고 예술로 재탄생시킨 연우의 반짝임이 이 한곡으로 반짝반짝 빛났답니다.
그녀가 노래를 부르면서 활짝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더 이상 지완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윤환에게 말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 온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연우는 그 어느 때보다 예쁘게 미소 지었다. 열린 결말이지만 뒷이야기가 쉽게 상상되는 마지막 장면이기에 좋았던 찰나였습니다.
한예리의 편안한 목소리와 음악의 조화가 멋졌던 엔딩이었어요. 정바비에게 기타 레슨을 받았고 노래 또한 자신의 목소리로 소화해 드라마의 묘미를 더해 준 여주인공의 활약이 눈에 쏙 들어왔던 드라마 스페셜, [연우의 여름]이었습니다.
내가 나일 때 비로소 빛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각자의 이름 아래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가 존재함으로 인해서예요. 그렇기에 [연우의 여름]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지 않았을까요? 여름을 지나 다가올 가을도, 춥지만 쓸쓸하지 않을 겨울도. 앞으로의 계절이 모두 그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인디적인 색채과 음악과 스토리 안에 잔뜩 묻어났으며, 감각적인 촬영과 배우들의 열연이 눈부셨던 작품이었습니다. 이런 단막극이라면 언제든지 기분좋게 만나지 않을 수가 없을 듯 하니 앞으로도 기대해 보고 싶어집니다.